"자성대(子城臺)는 부산광역시 동구 자성로 99(범일동)에 있는 조선시대에 만든 부산진성의 지성을 말한다. 원래는 부산성의 한 부분으로 공식적인 이름은 부산진지성(釜山鎭支城)이며, 넓이는 24,198 제곱미터로 1972년 6월 26일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7호로 지정되었다.
자성대의 유래는 부산진성을 본성 또는 모성(母城)이라는데 대해 자성대의 성을 지성 또는 자성(子城)이라는 뜻이라고 하며, 또 정상에 자성을 만들어 장대(將臺)로 삼았다고 하는데서 비롯되었다고도 한다.
부산포에는 내성과 외성이 있었는데, 내성(內城)인 본성(本城)은 현재 정공단이 있는 일대를 중심으로 뒷산인 증산을 둘러싸고 있던 성이고, 자성대는 그 외성(外城)으로 쌓은 것인데, 임진왜란 때 왜군이 부산에 주둔하면서 선조 26년에 왜장 모리(毛利輝元) 부자가 부산성을 헐고 왜성(倭城)으로 다시 쌓았다. 소서성·환산성이라고도 불리었으며, 왜군의 지휘소로 이용되었다. 왜군을 몰아낸 뒤에는 명나라 만세덕 휘하 군대가 머물러 만공대라고도 했었으며, 임진왜란이 끝난 후에는 성과 사대문을 쌓고 관아를 고쳐 부산진첨사영(釜山鎭僉使營)으로, 좌도수군첨절제사의 숙소로 쓰였다.
동서의 산을 따라 성벽으로 성곽을 두르고 바닷물을 끌여들여 참호를 20 미터 너비로 만들어 배가 바로 성벽에 닿도록 되어 있었다고 하는데, 일제강점기에 시가지 정비라는 명목으로 성을 철거하고 자성대 일대 해면은 매축되어 옛모습이 없어졌다.
1974년 7월 8일부터 1975년 2월 25일까지 부산시에서 정화 복원공사를 하여 동문, 서문, 장대를 신축하여 동문을 건춘문(建春門, 원래는 진동문(進東門)), 서문을 금루관(金壘關), 자성대 정상부에 장대는 진남대(鎭南臺)라고 각각 이름 붙이고 편액을 달았다. 1975년 9월 동문 주변 성곽을 신축하였으며, 서문의 금루관은 높은 다락으로 좌우에는 남요인후, 서문쇄약이라 새긴 돌기둥(우주석)이 각각 서있다.
조선시대에는 성 안에 객사, 동헌 등 많은 관공서와 창고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는 임진왜란에 참전했다가 귀화한 명나라 장군 천만리(千萬里)의 후손이 세운 천장군기념비와 동쪽 산 중턱에는 남해안 일대를 노략질한 왜구를 소탕한 최영장군 비각이 보존되어 있다.

 

영가대:
1614년 광해군때 경상도 순찰사 권반이 부산진성 근처 해안가에 선착장을 만들고 그 위에 나무를 심고 정자를 만들었다. 1617년 회답겸쇄환사(回答兼刷還使)였던 오윤겸(吳允謙)이 이 정자에서 일본으로 출발한 다음부터 통신사행은 이곳에서 해신제를 올리고 일본으로 갔다. 1624년(인조 2) 선위사 이민구(李敏求)가 일본 사절을 접대하기 위해 부산에 파견되었다가 이 정자를 보고 권반의 고향 안동의 옛 이름인 영가(永嘉)를 따서 ‘영가대’(永嘉臺)라고 이름지었다. 원래 동구 범일동 성남초등학교 서쪽 경부선 철로변에 있었던 영가대는 1905년 경부선의 개통으로 철거되어 일제 강점기 때 일본상인 오이카와(及川民次郞)의 별장인 능풍장으로 옮겨졌다가 사라졌는데, 2000년 부산광역시의 역사유적지 표석 설치계획에 따라 동구 좌천동 지하철역 부근의 도로공원에 “부산포왜관·영가대터” 표석을 세웠고, 2003년 9월 25일 동구청에서 자성대에 복원했다." (출처: 문화재청)

 

자성대 경내에는 조선통신사역사관도 있습니다.

 

자성대 정상부에 있는 장대인 진남대:

 

진남대 후면:

 

자성대의 동문인 건춘문:

 

영가대:

 

천장군기념비:

 

최영장군 비각:

 

자성대 북문입구:

 

조선통신사역사관 입구:

 

 

아래 사진모음은 자성대와 조선통신사역사관의 안내문 및 전시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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